소련식 붕따우: 석유 노동자들은 베트남 안에 어떻게 러시아 마을을 세웠나

소련식 붕따우: 석유 노동자들은 베트남 안에 어떻게 러시아 마을을 세웠나

남중국해 연안, 야자수와 어시장, 불교 사원 사이에는 후기 소련을 배경으로 한 영화 세트처럼 보이는 동네가 있다. 5층 아파트, 러시아 학교, 잡화점, 식당, 체육관과 유치원. 예전에는 출입구를 통제했고, 아침마다 버스가 집 앞에서 기술자들을 태워 갔다. 수평선 너머에서는 해상 플랫폼의 불빛이 밤새 타올랐다.

마을처럼 보이지 않는데도 이곳은 지금까지 ‘러시아 마을’이라 불린다. 자작나무를 그리워해 만든 곳도, 소련 시민의 작은 식민지도 아니었다. 베트남 현대사에서 가장 위험하면서도 성공적인 산업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를 중심으로 생겨난 도시였다.

소련 전문가들을 붕따우로 불러들인 석유는 전쟁 뒤 가난했던 나라가 수백억 달러를 벌고, 발전소와 첫 정유공장을 세우며, 자체 공학 전통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었다. 송유관과 시추 장비, 해상 플랫폼 곁에는 낯선 열대 도시가 자랐다. 러시아 아이들은 베트남의 뗏을 보내고, 베트남 학생들은 러시아어를 배웠다. 서로의 말을 한마디도 모르는 사람들도 함께 일하고, 시장에서 흥정하고, 자전거를 고치고, 가정을 꾸렸다.

자기 나라의 석유를 찾아 나선 베트남

전쟁이 끝난 뒤 베트남은 정치 지도 위에서만 하나의 나라였다. 경제는 거의 처음부터 다시 세워야 했다. 전기와 연료, 도로, 장비, 외화가 모두 부족했다. 통일 전부터 남부 앞바다에 석유가 있을 것으로 추정했지만, 지질학적 가능성을 실제 해상 유정으로 바꾸려면 산업 전체를 만들어야 했다.

석유 프로젝트 초기의 붕따우 해안 기지와 항구
석유 프로젝트 초기의 붕따우 해안 기지와 항구

선박, 시추 설비, 연구소, 해상 플랫폼, 대륙붕의 지질을 이해할 인력이 필요했던 베트남은 소련에 손을 내밀었다. 1981년 합작기업 비엣소페트로가 설립됐다. 이름은 소련 관료제의 산물처럼 들렸지만 임무는 모험에 가까웠다. 바다에서 상업성 있는 석유를 찾고, 기반 시설도 국내 석유 기술 전통도 없는 곳에서 그것을 캐내는 법을 배우는 일이었다.

소련은 기술과 경험을 가져왔다. 베트남은 해역과 육상 기지 부지, 현지 인력을 제공했고 최대한 빨리 자국의 석유를 얻고자 했다. 서류 위에서는 두 국가의 우정이었지만, 현실의 우정은 열대의 더위와 언어 장벽, 바다의 폭풍, 좀처럼 답을 주지 않는 유정을 견뎌야 했다.

소련과 베트남 전문가들이 붕따우의 작업을 논의하고 있다
소련과 베트남 전문가들이 붕따우의 작업을 논의하고 있다

1986년 바익호, 즉 ‘백호’ 유전에서 첫 상업 원유가 나왔다. 베트남에는 단순한 천연자원 발견 이상의 사건이었다. 외화로 바꿀 수 있는 상품이 생겼고, 채굴을 중심으로 산업과 경제를 키울 기회가 열린 것이다.

프로젝트의 진짜 규모는 훗날 드러났다. 2024년 5월까지 비엣소페트로는 2억 5천만 톤의 원유를 생산했다. 베트남 역사상 전체 석유 생산량의 약 60퍼센트다. 누적 매출은 890억 달러를 넘었고, 베트남이 세입과 이익으로 받은 금액은 580억 달러를 웃돌았다.

하지만 1980년대 초에는 그런 거액이 없었다. 바다와 더위, 공사장, 그리고 하나의 지질학적 가설을 석유 산업으로 바꾸어야 하는 첫 전문가들만 있었다.

열대 지방으로의 파견

베트남 파견은 행운으로 여겨졌다. 해외 근무는 드문 경력과 특별한 지위, 대부분의 소련인이 신문으로만 보던 세계를 직접 볼 기회였다. 출국 전에는 얇은 면옷과 샌들, 챙 넓은 모자, 모기와 바퀴벌레 대책을 챙기라는 안내를 받았다. 대륙붕을 정복하기 전에 먼저 모기부터 상대해야 했던 것이다.

초기 사람들은 완성된 주거 단지가 아니라 거대한 공사장에 도착했다. 기후도 음식도 낯설었고, 고향과 연락하기도 어려웠다. 습한 열기는 밤까지 이어졌고, 계절풍의 비는 거리를 시냇물로 만들었다. 평범한 집안일조차 하나의 과제가 됐다.

붕따우 항구의 시추 장비 앞에 선 전문가들
붕따우 항구의 시추 장비 앞에 선 전문가들

해외 근무가 곧 부를 뜻하지는 않았다. 소련 전문가의 급여는 모스크바에서 정했고, 기록에 따르면 비엣소페트로 직원은 다른 기관을 통해 베트남에 온 소련인보다 적게 받기도 했다. 대신 장기 근무 수당이 있었다. 몇 년 뒤에는 한 달치 급여를, 5년 뒤에는 두 달치를 추가로 받았다. 잠시 다녀가기보다 새 장소에서 실제 삶을 꾸리도록 만든 제도였다.

시추 장비 다음으로 중요한 도구는 통역사였다. 많은 베트남 기술자가 소련에서 공부했거나 소련 교사에게 배워 러시아어를 했다. 강의와 지침, 문서는 베트남어로 번역됐다. 그러나 복잡한 기술 개념은 여러 단계의 통역을 거치며 전혀 다른 뜻이 되기도 했다. 강사의 말이 청중에게 도착할 즈음에는 왜곡돼 있었다는 회고도 남아 있다.

모든 소련 석유 노동자가 의무적으로 베트남어를 배웠다는 증거는 없다. 직장에서는 통역사와 러시아어를 아는 동료의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회사 문 밖에서는 시장 가격, 식재료 이름, 집으로 가는 길, 이웃에게 건넬 인사말을 배우는 또 다른 언어 수업이 시작됐다.

말이 전혀 필요 없는 때도 있었다. 베트남 신문은 러시아 단지 근처의 자전거 수리공 이야기를 전했다. 그는 러시아어를 몰랐고 손님들은 베트남어를 몰랐다. 그래도 체인이나 브레이크, 바퀴를 가리키고 손으로 문제를 설명하면 곧 고친 자전거를 타고 돌아갈 수 있었다.

야자수 아래의 5층 아파트

소련 전문가들이 여러 해 머물고 가족까지 데려오리라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임시 숙소만으로는 부족했다. 1984년 비엣소페트로에 학생 48명의 러시아 학교가 문을 열었다. 1985년에는 첫 5층 주거동이 완공돼 전문가들이 자기 동네로 이사하기 시작했다.

붕따우 비엣소페트로 주거 단지 입구
붕따우 비엣소페트로 주거 단지 입구

주택과 유치원, 학교, 진료소, 식당, 상점, 문화회관, 도서관, 축구장, 테니스장과 배구장까지 거의 완전한 소련식 생활 기반이 생겼다. 다만 건물 사이에서 흔들리는 것은 자작나무와 포플러가 아니라 열대 나무였고, 빨래는 금세 말랐으며, 바다는 걸어서 갈 수 있었다.

러시아인 주거지의 아파트 건물 중 하나
러시아인 주거지의 아파트 건물 중 하나

공동체 규모에 관한 자료는 엇갈린다. 약 500가구, 1,200명이라는 집계도 있고, 가장 붐비던 시기에는 거의 5천 명이었다는 베트남 보도도 있다. 범위와 노동자 분류가 달랐을 가능성이 크다. 어느 쪽이든 작은 기술자 집단이 아니라 독자적인 삶을 가진 큰 공동체였다.

베트남 사람들은 이곳을 러시아 구역이나 러시아 거리 대신 ‘러시아 마을’, 즉 랑응아(làng Nga)라고 불렀다. 베트남 기자들은 여기서 ‘마을’은 규모가 아니라 이웃과 공동체, 서로를 아는 사람들을 뜻한다고 설명했다.

붕따우 러시아인 주거지의 문화·상업 센터
붕따우 러시아인 주거지의 문화·상업 센터

동시에 이 단지는 가난한 전후 베트남에서 특권적인 공간이었다. 소련은 전문가용 식품을 별도로 들여오자고 제안했지만 베트남 당국은 조심스러워했다. 담장 안의 수입 소시지와 버터가 우정의 상징을 불평등의 전시장으로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5층 아파트의 생활은 도시와 완전히 단절되지 않았다. 러시아인들은 현지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가격을 비교하며 흥정을 배웠다. 베트남 이웃을 따라 처음 보는 채소를 샀다가 요리법을 몰라 난감해하기도 했다. 단지 주변에는 러시아어 간판이 나타났다.

비엣소페트로 주거 단지의 안뜰
비엣소페트로 주거 단지의 안뜰

두 세계의 경계는 담장이 아니라 평범한 내부 도로였다. 러시아인과 베트남인은 매일 그 길을 따라 출근했고, 저녁이면 두 나라의 기술자와 노동자가 배구장에서 만났다. 세월이 흐르자 그 길은 어떤 검문소보다 중요한 장소가 됐다.

붕따우에 있는 소련 시대 5층 아파트의 정면
붕따우에 있는 소련 시대 5층 아파트의 정면
러시아인 주거지의 VRB 은행과 러시아어 축하 현수막. 사진: Lưu Sơn
러시아인 주거지의 VRB 은행과 러시아어 축하 현수막. 사진: Lưu Sơn

낯선 곳의 평범한 삶

어른에게 베트남은 일터일 수 있었지만, 아이에게는 어린 시절 그 자체였다.

아이들은 소련식 아파트에서 살고 러시아 교육과정을 따르며 푸시킨을 읽고 튜멘이나 바쿠 학생과 같은 문제를 풀었다. 그러나 교문 밖에는 바다와 열대성 폭우, 베트남 명절, 다른 언어를 쓰는 친구들이 있었다.

나중에는 베트남 아이들도 러시아 학교에 다녔다. 2010년대 초에는 러시아 학생 약 250명과 베트남 학생 20명이 함께 공부했다. 교실에는 베트남 학생이 러시아 친구에게 준 선물이 남아 있었고, 저녁이면 동네의 베트남 아이들이 러시아어를 배우러 왔다.

붕따우 러시아 학교의 학생들. 사진: Mai Thắng
붕따우 러시아 학교의 학생들. 사진: Mai Thắng

학교는 러시아와 베트남 학생의 자선 경기를 열었다. 주민들이 낸 입장료는 지역 보육원에 전달됐다. 아이들은 장터에서 직접 만든 과자와 각국 음식을 팔고, 뗏을 앞두고 공연을 열어 아기부터 청소년까지 쓸 선물을 샀다. 러시아 학생들은 베트남의 중추절을 배운 뒤 다른 아이들을 위한 축제를 직접 준비했다.

부모에게 이주는 몇 년짜리 계약일 수 있지만, 아이에게 몇 년은 인생의 절반일 수 있다. 누군가는 여기서 학교에 들어갔고, 누군가는 남중국해에서 수영을 배웠다. 집에서는 부모와 러시아어로 말하고 친구들과는 여러 언어와 몸짓을 섞었다. 오늘날에도 이 학교 학생들은 러시아 친구와 베트남 친구가 모두 있다고 말한다.

함께 일한 인연이 가족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교환학생으로 베트남을 찾았던 한 러시아 여성은 모스크바로 돌아간 뒤 다시 오고 싶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몇 년 후 비엣소페트로 통역사가 된 그는 메콩강 삼각주 출신 기술자를 만났고, 이듬해 그의 고향 벤째에서 결혼했다. 직업으로 택한 언어가 자신의 가족으로 이어진 셈이다.

또 다른 이야기는 1993년 러시아에서 시작됐다. 해양기술대학에 유학 온 베트남 청년이 학생 모임에서 러시아 여성을 만났다. 두 사람은 볼가강을 산책했고, 2년 뒤 결혼해 베트남으로 이주했다. 붕따우에서 남편은 산업안전 기술자로 일하며 오랫동안 해상 플랫폼에 머물렀다. 아내는 러시아 단지의 상업센터에서 빵을 구웠다. 바다에 폭풍이 일면 그는 해변으로 나가 남편이 있는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부부에게는 세 아이가 생겼다. 두 큰딸은 나중에 캐나다로 유학했고, 막내는 러시아 동네 학교에 남았다. 러시아와 베트남, 제3의 나라가 한 가족 안에서 만났지만 집은 여전히 석유 노동자 도시의 5층 아파트였다.

이런 이야기에서 ‘소련과 베트남의 우정’은 구호를 벗어나 일상이 된다. 뗏 초대, 아이에게 주는 붉은 봉투, 축구 경기, 집에서 만든 파이, 플랫폼에 있는 가족을 향한 걱정, 서로의 말을 절반도 알아듣지 못하지만 함께 축하하는 결혼식 같은 것들이다.

‘백호’: 베트남을 바꾼 석유

러시아 단지가 이 사업의 인간적인 심장이었다면 경제적 심장은 바익호(Bạch Hổ), 즉 ‘백호’ 유전이었다.

바익호 유전의 해상 플랫폼
바익호 유전의 해상 플랫폼

처음에는 교과서가 가리키는 퇴적암에서 석유를 찾았다. 그 아래의 오래된 화강암 기반암은 석유가 없을 경계로 여겨졌다. 그런데 1988년 9월 한 유정을 재시험하던 중 그 화강암의 균열에서 상업성 있는 원유가 흘러나왔다.

석유는 단단한 돌 안이 아니라 풍화된 고대 암반의 균열과 빈 공간에 모여 있었다. 당시 석유 지질학의 관점에서 저류층 규모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 발견은 화강암 기반암에서 석유를 생산한 대표적 사례로 업계 문헌에 남았다.

2024년 5월까지 비엣소페트로가 생산한 석유 가운데 5분의 4, 약 2억 톤이 이 저류층에서 나왔다. 처음에는 지질학적 예외로 보였던 것이 나라의 석유 번영을 떠받치는 기반이 됐다.

석유에는 동반자가 있었다. 바로 수반가스였다. 초기에는 쓸 곳이 거의 없어 플랫폼에서 태웠고, 바다 위 가스 불꽃은 밤낮없이 빛났다. 산업적 회수가 시작되기 전 약 45억 세제곱미터가 사라졌다는 베트남 측 추산도 있다. 당시 베트남은 전기가 절실히 부족했다.

밤의 바익호 유전 플랫폼과 가스 플레어. 사진: Genghiskhanviet
밤의 바익호 유전 플랫폼과 가스 플레어. 사진: Genghiskhanviet

1990년대 중반 가스를 육지로 보내기로 했다. 한국의 현대산업이 106.5킬로미터 해저 구간을 깔고, 베트남 석유·가스 기관이 바리아와 해안 시설까지 육상 구간을 건설했다. 비엣소페트로, 베트남가스, 캐나다 SNC-라발린이 함께 설계했다. 해상 압축시설을 기다리는 대신 가스정의 자연 압력을 이용했고, 해저 관로를 지나는 동안 바닷물이 가스를 식혔다.

첫 가스는 1995년 4월 육지에 도착했다. 며칠 뒤 바리아 발전소는 전력망에 전기를 공급하고 값비싼 디젤 사용을 멈출 수 있었다. 백호 가스는 다른 발전소와 푸미 비료공장에도 갔다. 플랫폼 위에서 헛되이 타던 불꽃이 도시의 전기, 공장의 에너지, 베트남 농지의 비료가 된 것이다.

석유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대형 정유공장이 없던 시절 베트남은 원유 대부분을 수출했다. 이후 들어선 중꿧 정유공장은 원래 백호의 저유황 경질유나 비슷한 원료에 맞춰 설계됐고, 휘발유와 경유, Jet A-1 항공유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2011년 베트남항공은 중꿧에서 생산한 첫 항공유를 공급받았다. 페트롤리멕스는 정유제품의 주요 구매자가 되어 일반 주유소망으로 연료를 유통했다. 러시아 도시를 탄생시킨 석유가 베트남항공 여객기나 페트롤리멕스 주유소 자동차의 연료탱크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특정 물량의 경로를 추적할 수 없다. 중꿧은 베트남산과 수입산 원유를 함께 처리하며 원료는 저장탱크에서 섞이고 제품은 공동 공급망으로 들어간다. 그래도 연결 고리는 실제다. 붕따우 앞바다, 화강암 속 유정, 정유공장, 하늘의 비행기, 길가의 주유소가 하나의 사슬로 이어진다.

비엣소페트로 생산량은 2002년 약 1,350만 톤으로 정점을 찍었다. 이후 백호는 늙기 시작했다. 압력이 떨어지고 유정의 물 비율은 늘었으며 쉽게 꺼낼 석유는 줄었다. 이제 기술자들은 물 주입, 가스 리프트, 수중 펌프를 이용해 미세한 균열에서 석유를 끌어내고 유정의 운전 방식을 끊임없이 조절한다.

소련식 붕따우가 남긴 것

소련이 사라진 지 30년이 넘었다. 백호는 오래전에 생산 정점을 지났고, 초기 전문가 상당수는 귀국하거나 은퇴했다. 그들의 아이들도 자라 여러 나라로 흩어졌다. 그러나 러시아 단지는 텅 빈 시대극 세트가 되지 않았다.

공식 자료와 언론 추산에 따르면 비엣소페트로에는 지금도 러시아 측 직원 약 400~500명이 일한다. 가족을 포함한 붕따우의 러시아어 공동체는 약 1천 명이다. 러시아 전문가는 주택을 배정받고, 자녀는 1984년에 문을 연 같은 학교에 다닌다. 현재 학생은 약 260명이다.

붕따우 추모 행사에 참여한 러시아인 마을의 학생과 주민들
붕따우 추모 행사에 참여한 러시아인 마을의 학생과 주민들

그사이 베트남 전문가는 과거 소련 기술자만 할 수 있던 일 대부분을 넘겨받았다. 러시아인은 더 이상 석유 산업을 처음부터 세우러 오지 않는다. 지질학자, 시추·생산 기술자, 자동화·해양구조물 전문가, 노후 유전 전문가, 관리자, 통역사와 교사로 일한다.

이제는 교사와 학생의 관계가 아니다. 같은 프로젝트에서 자란 두 공학 전통의 협력이다. 러시아 기술자의 경험이 오래된 플랫폼의 수명을 늘릴 때도 있고, 한 유정을 20년 동안 다룬 베트남 전문가가 그 유정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알 때도 있다.

해외 파견도 계속된다. 최근 보도에서 한 러시아 통역사는 2019년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베트남으로 이주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가족은 러시아 단지에 자리 잡고 아이들은 학교에 다녔다. 부모는 현지 음식과 베트남 커피에 익숙해졌다. 이들에게 그것은 소련의 옛이야기가 아니라 21세기의 평범한 삶이다.

붕따우 러시아인 주거지의 불멸의 연대 행진
붕따우 러시아인 주거지의 불멸의 연대 행진

바다의 작업도 이어진다. 2025년 백호 북부에서 BK-24라는 소형 무인 자동화 플랫폼이 가동을 시작했다. 상주 인력은 없고 유정은 원격 제어되며, 원유는 관로를 통해 기존 백호 시설로 보내진다. 초기 유정 생산량은 하루 400톤을 넘었다. 개발을 시작한 지 거의 4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새 생산 구역을 찾고 있다.

베트남은 1980년대의 석유 경제를 오래전에 넘어섰다. 해마다 약 1천만 톤의 석유를 생산하지만 훨씬 더 많은 연료를 소비한다. 일부 국산 원유를 수출하면서도 해외에서 수백만 톤을 수입한다. 중꿧은 국내 경질유에 알맞고, 응이선 정유공장은 중동산 원유에 맞춰 설계됐다. 베트남산과 수입산 원유로 만든 제품은 국내 시장에서 함께 팔린다.

여기에 백호 유산의 핵심 역설이 있다. 석유는 베트남을 더 부유하게 만들고 산업과 소비를 키웠지만, 그 결과 국내 생산만으로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됐다. 에너지 자립을 위해 시작한 프로젝트가 성장의 엔진이 되었고, 그 성장은 자국 유정이 채우지 못할 수요를 낳았다.

러시아 단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아침이면 5층 아파트 사이에서 차량이 전문가들을 태우고 출발한다. 학교 종이 울리고, 아이들이 마당에서 논다. 그들에게 소련은 모스크바나 하노이의 또래에게 그렇듯 역사다. 바다에서는 여러 세대의 러시아와 베트남 기술자가 세운 플랫폼이 계속 움직인다.

사라진 시대의 파편처럼 보이는 장소가 아직 현재형으로 살아 있다. 소련 시대는 끝났지만, 그 시대가 만든 삶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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