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 음악도 무기도 없이: 전쟁 속 코코넛 왕국의 삶
전쟁 한가운데에 무기와 결혼, 음악은 없지만 기도와 코코넛, 포탄 탄피로 만든 종이 있는 별개의 세계를 세울 수 있을까? 1960년대 메콩델타의 껀풍섬에는 실제로 그런 공동체가 존재했다. 프랑스에서 교육받은 사업가 응우옌 타인 남이 세운 곳이다. 그는 ‘코코넛 수도자’가 되어 종교뿐 아니라 분단된 베트남까지 화해시키려 했다.
전쟁이 없었던 섬
1968년 봄, 21세 미국인 기자 존 스타인벡 4세는 사이공에서 미토까지 버스를 타고 간 뒤 작고 바닥이 평평한 삼판으로 갈아탔다. 한 베트남인 지인이 메콩강 한가운데 섬에서 ‘코코넛 수도자’라는 별명의 침묵하는 수행자가 대규모 평화 회의를 연다고 알려 주었다. 스타인벡은 또 하나의 사원을 예상했다. 그러나 야자수 뒤에서 나타난 것은 불교식 놀이공원처럼 보이는 공간이었다.
수면 위로 7층 탑이 솟아 있었다. 거대한 기도 광장에는 메콩강의 아홉 지류를 뜻하는 아홉 용이 휘어져 있었고, 머리에는 색색의 불빛이 켜졌다. 십자가 옆에는 불교 만자 문양이, 음양 원 옆에는 화려한 탑과 계단이 자리했다. 강 위에는 작은 도시와 산, 숲까지 표현한 길이 약 21미터의 베트남 입체 지도가 걸려 있었다. 남북 양쪽에서는 무지개다리의 교각이 솟아, 적어도 이곳에서만큼은 북과 남을 잇고자 했다.
섬은 모습뿐 아니라 소리로도 존재를 드러냈다. 사원 모서리에는 수백 개의 커다란 종이 매달려 있었다. 그 형태와 크기는 스타인벡에게 어딘가 익숙했다. 얼마 전까지 그는 베트남에서 미군으로 복무했다. 나중에 그는 종들이 175밀리미터 포탄의 황동 탄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메콩강 양쪽에서 총성이 이어지는 동안, 섬에서는 전쟁 무기가 말 그대로 평화를 부르는 소리를 냈다.
그날 약 400명이 살던 껀풍섬은 남이 마련한 이틀간의 평화 축제를 찾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수백 명의 남녀가 기도 광장에서 절했다. 그 위 인공산의 벽감에는 가슴에 커다란 기독교 십자가를 단, 사프란색 옷의 작고 마른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는 말없이 활짝 웃으며 코코넛과 매운 붉은 고추로 아침을 먹었다.
그가 응우옌 타인 남이었다. 전쟁과 전쟁이 강요한 규칙을 피할 쉼터로 이 섬 공동체를 만든 사람이었다.
기술자는 어떻게 코코넛 수도자가 되었나
자료에 따라 응우옌 타인 남은 1909년 또는 1910년 메콩델타 벤째 지역의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프랑스 식민 통치 아래 행정직을 맡았고, 덕분에 아들은 당시 대부분의 사람이 누리지 못한 교육을 받았다. 1928년 젊은 남은 화학을 공부하러 프랑스로 떠났다. 몇 년 뒤 베트남으로 돌아왔다.
후대의 글은 거의 언제나 그를 화학기술자로 소개한다. 선거용 약력에서 남은 여러 프랑스 교육기관과 루앙의 화학학교를 열거했다. 그러나 생전에 그를 취재한 기자 윌버 개럿은 남이 대학이 아니라 사립학교에 다녔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귀국한 남은 지식을 실무에 활용하려 했고 코코넛 원료로 비누를 만드는 사업을 시작했다.
비누 공장은 남의 산업 경력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는 결혼해 가정을 꾸렸지만, 시간이 지나며 사업과 일상생활을 모두 떠났다. 유럽식 교육을 받은 부유한 사람이 왜 수행자의 길을 택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비누 사업의 실패가 전환점이었다는 이야기가 많지만 남 자신은 결정을 설명한 적이 없다.
1945년 그는 쩌우독 지역에서 불교 수계를 받고 베트남 남서부 산악지대로 오랫동안 들어갔다. 높은 단에서 명상하고 침묵을 지키며 주로 과일을 먹었다. 신도들은 그가 몇 년간 거의 코코넛만으로 살았다고 전했다. 그런 단식의 기간은 확인할 수 없지만 코코넛이 일상 수행의 일부였던 것은 분명하다. 그는 코코넛 물을 마시고 과육을 먹었으며 다른 음식에도 사용했다.
‘코코넛 수도자’와 ‘코코넛 종교’라는 이름은 남이 만든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그와 신도들을 부르던 말이었다. 코코넛 야자를 택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고향 벤째를 대표하는 나무이자 소박한 삶의 상징이었고, 물과 음식, 기름, 섬유, 건축 재료까지 거의 모든 것을 제공했다.
그렇다고 남이 코코넛을 숭배하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핵심 사상은 종교의 화해였다. 그의 기도에는 부처, 그리스도, 성모 마리아, 관음, 노자와 공자가 함께 등장했다. 그는 성탄절과 석가탄신일을 기념하고 불교 옷 위에 기독교 십자가를 걸었다. 성소의 회전식 양면 판 한쪽에는 부처가 그리스도를 안고, 다른 쪽에는 성모 마리아가 관음보살을 안는 모습이 있었다.
1950년대 말부터 남은 전쟁 종식을 더 자주 주장했고 여러 차례 투옥됐다. 다음 10년대 초 그는 메콩강 지류인 띠엔강의 작은 껀풍섬을 선택했다. 신도들의 기부금으로 이곳에 그의 ‘성지’ 건설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호기심 때문에 섬을 찾았다. 전쟁이 커지면서 코코넛 왕국은 더 이상 구경거리가 아니라 피난처가 됐다.
성도 음악도 무기도 없이
베트남 설인 뗏을 맞은 1968년 초 대규모 공세가 시작됐다. 전투는 남베트남의 도시와 농촌으로 번졌고 난민들이 껀풍섬으로 몰려왔다. 그중에는 군대에 가기를 거부한 징집 연령의 남성도 있었다. 1970년대 초 섬을 방문한 한 기자는 약 1,500명의 젊은 남성을 보았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최대 5,500명이 이곳에서 병역을 피했을 수 있다고 추정했다. 섬은 작은 마을 크기의 정착지가 됐다.
기본 규칙은 종교 공동체에서 익숙한 것들이었다. 살인과 도둑질, 음주, 흡연, 도박이 금지됐다. 험담과 무의미한 대화, 음악 감상, 유행 추종, 성관계도 허용되지 않았다. 섬 사람들은 소박한 옷을 입고 식물성 음식을 먹으며 정기적으로 기도했다.
가장 뜻밖의 규칙은 결혼 금지였다. 다만 반드시 평생 지속되는 것은 아니었다. 남자는 병역 연령이 끝나는 서른네 살 이후 결혼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평화가 오면 그보다 일찍 결혼하는 것도 가능했다.
나라의 정상적인 삶과 함께 개인의 삶도 멈춰 세운 셈이었다. 젊은이들이 누군가를 죽이거나 죽으러 보내질 수 있는 동안에는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서는 안 됐다. 남 자신은 이미 결혼해 딸도 있었지만, 고행에 들어가며 가족을 벤째에 두고 왔다. 그는 인구 증가를 억제해야 한다며 신도들에게 ‘아이를 만들지 않는’ 규칙을 두었다.
왜 모든 음악을 금지했는지도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다. 음악은 아마 유행, 술, 도박과 함께 고행을 방해하는 오락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유행을 거부하면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겉모습 차이도 사라졌다. 껀풍섬에서는 부잣집 아들과 농부, 전투 지역에서 도망친 사람이 모두 똑같아 보여야 했다.
규칙이 노동을 면제해 주지는 않았다. 남은 대략 ‘손이 일하지 않으면 턱도 씹을 것이 없다’고 옮길 수 있는 원칙을 반복했다. 신도들은 농사를 짓고 코코넛 수공예를 했다. 껀풍섬에는 빈 땅이 적어 주요 농업은 섬 밖으로 옮겨야 했다. 부유한 지지자들의 돈으로 공동체는 안장성에 약 3.2헥타르의 토지를 사서 쌀과 다른 작물을 길렀다.
남이 원했음에도 코코넛 왕국은 완전히 자급자족하지 못했다. 친척들은 일부 주민에게 쌀과 식료품을 가져다주었고, 부유한 신도들은 건설을 지원했다. 순례자와 호기심 많은 방문객, 기자들은 계속 미토에서 메콩강을 따라 찾아왔다.
코코넛 야자는 놀랄 만큼 많은 것을 주었다. 간 과육을 짜 코코넛 밀크를 얻고 기름과 과자를 만들었다. 껍데기는 그릇과 작은 물건이 되고, 섬유는 밧줄과 돗자리, 솔이 됐다. 잎은 지붕과 직조품에, 줄기는 들보와 가구에 쓰였다. 공동체뿐 아니라 성 전체에서 나무의 모든 부분을 활용했다. 시간이 지나 벤째는 과자부터 가구까지 다양한 수공업의 중심지가 됐다.
다만 역사적 공동체와 오늘날의 관광 프로그램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벤째의 유명한 코코넛 과자는 이미 1930년대부터 만들어졌다. 오늘날 껀풍섬에서 보여 주는 과자, 라이스페이퍼, 기념품 공방이 코코넛 수도자의 신도들도 같은 상품을 팔았다는 증거는 아니다. 당시 공동체의 일은 농사와 코코넛 제품 제작이라는 큰 틀에서만 알려져 있다.
섬에서는 고행이 늘 정치와 맞닿아 있었다. 결혼 금지는 징집 연령이나 전쟁의 끝과 연결됐고, 살생 금지는 평화주의가 됐으며, 탄피는 종이 됐다. 남의 가장 기묘한 요구조차 주민들을 하나의 생각으로 이끌었다. 전쟁이 끝나야 정상적인 삶도 다시 시작된다는 것이었다.
코코넛 하나로 전쟁에 맞서다
평화로운 섬은 곧 남베트남 당국의 문제가 됐다. 무엇보다 군 복무를 거부한 수천 명의 젊은이를 숨겨 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징집 자원을 줄이고 종교적 선택을 정치적 불복종으로 바꾸었다. 남은 양쪽 모두와 대화를 시도했다. 북베트남 지도부를 직접 만나기 위해 하노이 방문을 신청했지만 허가받지 못했다. 1967년에는 호찌민 루트로 이어질 수 있는 캄보디아를 거쳐 몰래 북쪽으로 가려다 국경 근처에서 체포됐다. 이후 남베트남 당국은 그를 정치적으로 불온하다고 보고 이동을 제한했다. 수도자가 본토에 나타나면 경찰은 즉시 섬으로 돌려보내려 했다.
바로 이때 존 스타인벡 4세가 그의 곁에 왔다. 그의 아버지는 미국 작가 존 스타인벡으로, 《분노의 포도》, 《생쥐와 인간》, 《에덴의 동쪽》을 썼고 1962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유명 작가의 아들은 처음부터 영적 탐구를 위해 베트남에 온 것이 아니었다. 미군에 징집돼 종군기자로 일했다.
복무를 마친 스타인벡 4세는 독립 기자로 베트남에 돌아왔다. 껀풍섬에서 코코넛 수도자는 그에게 머물 것을 권하며 탁발 그릇과 공동체 옷을 건넸다. 젊은 미국인은 오래된 강 바지선 위에 지은 작은 오두막에 살며 남을 영적 아버지라 부르기 시작했다.
스타인벡을 통해 기자와 종군 사진가인 친구들이 섬을 찾기 시작했다. AP, UPI, Time, Newsweek, CBS, BBC, 프랑스 텔레비전과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코코넛 수도자를 알게 됐다. 20세기 미국의 대표적 사진가로 마릴린 먼로, 앤디 워홀, 미국 정치 엘리트의 초상으로 유명한 리처드 애버던도 그를 촬영했다. 코코넛을 든 메콩델타의 인물도 유명인들의 초상 목록에 들어갔다.
남은 외신이 자신이 갈 수 없는 곳까지 사상을 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금세 깨달았다. 어느 날 그는 스타인벡에게 사이공 차이나타운으로 기자들을 모아 달라고 부탁했다. 다가올 행동이 묻히지 않기를 바랐다. 수도자는 지붕을 사프란색으로 칠한 1954년형 뷰익 센추리를 타고 와 다음 날 대통령궁과 미국 대사관으로 가겠다고 발표했다.
그는 코코넛을 들고 갔으며, 뭉툭한 끝의 검은 ‘눈’ 세 개를 평화의 표지로 해석했다. 사실 모든 코코넛에 있는 홈이었다. 작은 행렬이 미국 대사관에 다가가자 대문은 쇠사슬로 잠겼고 지붕에는 무장 군인이 나타났으며 헬리콥터가 상공을 돌기 시작했다. 작고 나이 든 수도자는 보도에 앉아 점심을 준비했다. 기자와 행인이 모이자 군사력 과시는 점점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마침내 외교관이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는 린든 존슨에게 보내는 편지는 받았지만 코코넛은 거절했다. 미국 대통령은 외국 정치인의 선물을 받을 수 없다는 설명이었다.
편지에는 그만큼 거대한 평화 계획이 담겼다. 남은 존슨에게 대형 수송기 20대를 요청했다. 신도와 건축 자재를 남북베트남 사이 비무장지대로 옮길 생각이었다. 그는 벤하이강 한가운데 기도 탑을 세우고 음식과 물 없이 올라가며, 양쪽 강변에는 각각 신도 300명을 배치하려 했다. 이들이 7일 밤낮 기도하면 전쟁이 끝난다는 계획이었다.
남베트남 당국은 평화 행동을 정치적 도전으로 보았다. 대사관 행진 뒤 남은 껀풍섬으로 돌려보내졌다. 그가 없는 동안 섬은 수색을 당했고 가까운 신도 수십 명이 구금됐다. 스타인벡의 회고에 따르면 공동체 주변에는 순찰정이 나타났고, 기도 중인 광장에 최루탄이 떨어지기도 했다.
남은 전쟁을 멈추지 못했다. 하지만 메콩강 한가운데의 작은 공동체는 양쪽에 불편한 질문을 던졌다. 적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살인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코코넛 왕국에 남은 것
1975년 전쟁이 끝나면서 껀풍섬은 이전 형태로 존재하지 않게 됐다. 통일 뒤 사회주의 당국은 독립적인 코코넛 종교를 미등록 ‘미신’ 집단으로 금지했고 조직 공동체는 해산됐다. 일부 신도는 떠났고 종교 활동은 중단됐으며 건축물은 서서히 무너졌다.
응우옌 타인 남은 이후 15년을 더 살았다. 그는 계속 지지자를 모으고 공개 활동으로 돌아가려 했으며, 다시 당국과 충돌했다. 1990년 5월 지방 당국은 미등록 종교 활동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신도들이 저항하며 충돌이 벌어졌다. 한 설명에 따르면 제자가 남을 당국자 앞으로 데려가려다 너무 세게 잡아당겼고, 허약한 노인은 넘어져 머리를 크게 다친 뒤 다음 날 병원에서 숨졌다. 죽음의 정확한 경위는 지금도 확인되지 않았다.
오늘날 껀풍섬에는 아홉 용 광장과 평화의 탑, 남꾸옥팟 사원의 일부가 남아 있다. 주변에는 관광단지가 운영된다. 사람들은 미토와 벤째에서 배를 타고 와 코코넛 과자를 맛보고 껍데기로 기념품을 만드는 모습을 보며, 용을 촬영하고 기묘한 수도자의 짧은 이야기를 듣는다.
조용한 관광 유적과 한때 수백, 어쩌면 수천 명이 이곳에 살았다는 사실을 연결하기는 어렵다. 그들은 고기, 결혼, 음악, 유행과 무기를 버리고 먹을 것을 길렀으며 코코넛으로 일하고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섬 위로 예광탄이 날아가는 동안 탑에서는 탄피로 만든 종이 울렸다.
이제 건축물들은 지나치게 기묘한 공연이 끝난 뒤 남은 무대장치처럼 보인다. 그러나 분단된 베트남 지도와 아홉 용, 탄피의 금속은 코코넛 왕국이 아름다운 전설을 위해 지어진 것이 아니라고 일깨운다. 주민들은 전쟁이 사람의 삶을 결정하지 않는 장소를 진지하게 만들려 했다.
댓글
참고
모든 글냐짱 포나가르 탑: 왕국이 사라진 뒤에도 숭배받는 여신
대지의 어머니는 어디에서 왔으며, 사람들은 왜 지금도 여신에게 공물을 바칠까요?
냐짱의 짬흐엉 타워: 연꽃이 아닌 이유와 내부 이야기
분홍색에서 흰색으로 바뀐 이유, 내부 전시와 방문에 필요한 정보를 소개합니다.
소련식 붕따우: 석유 노동자들은 베트남 안에 어떻게 러시아 마을을 세웠나
소련 석유 전문가들, 붕따우의 러시아인 주거지, 그리고 베트남 경제를 바꾼 바익호 유전의 이야기.
세계를 열광시킨 새: 플래피 버드를 만든 베트남 개발자 이야기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던 모바일 게임은 하루 수만 달러를 벌었습니다. 응우옌하동은 왜 전성기의 Flappy Bird를 삭제했고, 그 뒤에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상상으로 지은 호텔: 베트남 혁명가의 딸은 어떻게 크레이지 하우스를 만들었나
콘크리트 나무, 가족의 유품, 그리고 평생의 일이 된 건축 이야기.
닌빈, 하롱베이, 아니면 북부 산악지대: 하노이 여행에 어디를 더할까
처음 베트남 북부를 여행할 때 하노이만 보고 끝내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수도에서 몇 시간만 이동하면 전혀 다른 풍경을 만날 수 있습니다. 닌빈의 강과 석회암 카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