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 냐짱까지: 알렉상드르 예르생은 어떻게 베트남의 전설이 되었나
베트남 곳곳에는 알렉상드르 예르생의 이름을 딴 거리와 대학교가 있다. 그는 베트남인이 아니었고, 이 나라를 위해 전쟁에 참여한 적도, 공직을 맡은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베트남은 2014년 그에게 사후 명예시민 칭호를 수여했다. 냐짱에는 그의 동상과 공원, 박물관이 있으며 지금도 사람들은 무덤에 꽃과 향을 바친다. 수십 년 동안 프랑스 식민 지배에 맞서 싸운 나라에서 프랑스인 의사가 어떻게 이토록 깊은 사랑을 받게 되었을까?
어린 시절과 의학으로 향한 길
알렉상드르 예르생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몇 주 뒤인 1863년 가을에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름도 알렉상드르였으며 자연과학을 가르치고 곤충을 연구했다. 아버지가 단 한 번도 가르쳐 주지 못한 아들은 몇 년 뒤 똑같은 분야에 마음을 빼앗겼다.
어머니는 세 아이를 홀로 키워야 했다. 생계를 위해 제네바호가의 스위스 소도시 모르주에 여학생 기숙학교를 열었다. 예르생은 엄격한 개신교 가정에서 자라며 모험담을 읽고 산을 돌아다녔다. 그는 모든 생명체, 특히 곤충에 관심이 많았다. 그 호기심은 훗날 그를 의학으로 이끌었다. 로잔에서 시작해 독일 마르부르크를 거쳐 파리로 향했다.
파리의 병원에서 예르생은 몇 시간씩 부검에 매달렸다. 사람이 병들었을 때 몸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며 왜 신체가 버티지 못하는지 알고 싶었다. 환자 중에는 광견병에 걸린 동물에게 물린 사람들도 있었다. 의사들은 루이 파스퇴르가 개발한 새로운 광견병 예방접종으로 그들을 살리려 했지만, 일부는 치료가 너무 늦어 목숨을 잃었다.
이 일을 하던 1886년, 예르생은 파스퇴르와 함께 광견병 예방접종을 연구하던 의사 에밀 루를 만났다. 두 사람은 금세 뜻이 통했다. 루는 젊은 학생을 예르생이 오랫동안 꿈꾸던 파스퇴르의 연구실로 데려갔다. 그는 환자 접종을 돕다가 루와 함께 어린이병원에서 접했던 디프테리아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1888년, 스물다섯 살의 예르생은 박사학위를 받고 의사가 되었다. 곧이어 에밀 루와의 연구에서 첫 번째 큰 발견이 나왔다. 디프테리아균은 그 자체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몸을 중독시키는 독소를 분비한다는 사실이었다. 이 발견은 질병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었다. 감염을 막는 것뿐 아니라 균이 만든 독도 무력화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예르생은 막 문을 연 파스퇴르 연구소에서 연구를 이어갔다. 스승 곁에서 일하며 이미 의학적으로 중요한 발견에 참여한 그의 과학자 경력은 순조롭게 펼쳐지고 있었다. 하지만 여행을 향한 갈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파리에서 바다로
디프테리아 연구는 때때로 예르생을 파리 연구실에서 멀리 데려갔다. 질병의 확산을 조사하기 위해 노르망디의 영불해협 연안 도시 그랑캉을 찾았고, 그곳에서 새로운 열정을 발견했다. 이후 휴가 때마다 해안을 찾았으며 파리로 돌아온 뒤에는 편지에 파도 소리가 그립고 바다와 완전히 사랑에 빠진 것 같다고 썼다.
한편 파리에서는 1889년 만국박람회가 열리고 있었다. 예르생은 여러 번 박람회를 찾아 먼 나라의 전시관을 둘러보고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을 만났다. 그는 점점 그곳들을 직접 보고 싶어졌고,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하는 연구소 강의 준비에는 흥미를 잃어 갔다.
냐짱이 집이 되다
예르생은 돈을 벌면서 여행할 수 있는 선의가 되기로 했다. 파스퇴르에게 1년 휴가를 요청했고, 파스퇴르는 해운회사 Messageries Maritimes에 보낼 추천서를 써 주었다. 1890년 9월, 예르생은 쌍안경과 현미경을 챙겨 마르세유에서 아시아로 떠났다.
몇 주 뒤 그는 오늘날 호찌민시인 사이공에 도착했다.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처음에는 모든 것이 낯설고 무더워 몹시 당황했다고 털어놓았다. 근무할 배는 강 한가운데 정박해 있었고, 배에 가려면 보트를 빌려야 했지만 현지 화폐가 없었다. 프랑스에서 그를 태우고 온 증기선의 직원이 하룻밤 머물게 해 주고 저녁에는 산책에도 데려갔다. 혼란은 차츰 호기심으로 바뀌었고, 편지에는 야자수와 수상가옥, 중국인 거리 이야기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처음 몇 달 동안 예르생은 사이공과 필리핀 수도 마닐라를 오가는 노선에서 일했다. 진료가 없는 시간에는 선원들에게 별로 배의 위치를 알아내고 항해기구를 사용하며 지도를 그리는 법을 배웠다. 이후 사이공과 베트남 북부 하이퐁을 잇는 노선으로 옮겼다. 배는 해안을 따라 작은 항구들을 들렀고, 그중 하나가 냐짱이었다.
1891년 여름, 예르생은 냐짱에 내렸다. 배 위에서 여러 번 바라본 만과 모래사장, 해안 마을 뒤의 산을 이제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다. 항구 너머의 나라를 알고 싶었지만 정박할 때마다 배로 돌아가야 해 긴 여행은 불가능했다. 그해 말 그는 선의 일을 그만두었다.
냐짱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곳이 되었다. 어촌 쏨꼰에 살며 환자를 보기 시작했고, 형편이 되는 사람에게는 진료비를 받고 가난한 사람은 무료로 치료했다. 그는 배에서 일할 때부터 아픈 선원에게 어디가 불편한지 묻지 못하는 답답함 때문에 베트남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제 그 언어로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여행길의 마을에 머물며 환자들을 도울 수 있었다.
그러나 배를 떠나자 정기적인 수입도 사라졌다. 생활과 탐험에는 장비, 식량, 안내인과 교통수단이 필요했다. 파리 연구실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새 터전에서 안정적인 생계도 마련하지 못한 어려운 상황이었다.
해결책을 제시한 사람은 파스퇴르 학파의 또 다른 의사 알베르 칼메트였다. 백신 생산 연구실을 세우기 위해 사이공에 온 그는 예르생의 아시아 생활 초기에 그를 만났다. 칼메트는 정기 급여를 받으며 인도차이나에 머물 수 있는 식민지 의료부 입사를 권했다. 예르생은 공무가 자유를 빼앗을까 오랫동안 망설였지만 1892년 말 받아들였다. 여행을 위해 연구실을 떠났던 사람이 이제 여행을 계속할 돈을 마련하려고 군복을 입은 것이다.
그 무렵 예르생은 이미 냐짱에서 메콩강까지 탐험하고 강을 따라 프놈펜에 도착했다. 그의 관찰과 지도는 프랑스 식민 행정부의 관심을 끌었다. 다음 여행에는 산악지대를 조사하고 자원과 도로 건설 가능성을 평가하라는 임무가 주어졌다. 그 지원 뒤에는 지역 개발을 원하는 식민 당국의 이해도 있었다.
1893년 6월, 예르생은 탐험 도중 랑비앙고원에 올랐다. 눈앞의 초원 언덕을 일기에서 거대한 바다의 파도에 비유했고, 그 위의 산은 섬처럼 보인다고 썼다. 해안보다 서늘한 기후를 확인한 그는 훗날 열대의 더위를 피할 산악 휴양지를 이곳에 조성하자고 제안했다.
고원에는 이미 토착 공동체가 살고 있었고 예르생은 이곳을 찾은 최초의 유럽인도 아니었다. 그의 역할은 훗날 달랏이 들어설 지역에 관심을 모았다는 데 있다. 옛 선의의 여행은 그렇게 베트남에서 가장 유명한 산악도시 중 하나의 탄생과 이어졌다.
페스트균을 찾아서
1894년까지 예르생은 여러 해 동안 인도차이나를 여행했지만 질병 연구를 포기하지 않았다. 페스트가 발생하던 중국 윈난성에 가서 원인 미생물을 찾고 싶어 했다. 탐험 허가를 준비하는 동안 유행병이 홍콩에 닿았고, 그는 프랑스 당국의 허가를 받아 그곳으로 향했다.
홍콩은 거대한 국제항이었다. 질병은 배를 타고 퍼져 베트남까지 올 수 있었다. 원인을 밝히는 일은 과학자뿐 아니라 영토 내 유행을 두려워한 식민 당국에도 중요했다.
예르생이 도착했을 때 홍콩은 우기 한가운데였다. 폭우가 도시를 덮쳤고 주민들은 질병을 피해 달아났으며 병원은 환자를 감당하지 못했다. 임시 병동이 서둘러 세워졌다. 그는 사이공에서 빌린 장비와 현미경을 들고 베트남까지 번질 수 있는 병의 원인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연구를 시작하는 일은 전염병 도시로 오는 것보다 어려웠다. 영국이 통치하던 홍콩의 병원에서는 세균학자 시바사부로 기타사토가 이끄는 일본 조사단이 이미 활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연구 공간과 시신 접근권을 받았다. 예르생도 조직 표본이 필요했지만 부검 허가를 받지 못했고 시신은 일본 연구진에게 돌아갔다.
홍콩에서 오래 살며 현지 사정을 알고 통역을 도운 이탈리아 선교사 비가노 신부가 나섰다. 두 사람은 매장을 위해 시신을 옮기던 영국 선원들과 합의해 우회로를 찾았다. 병원 당국이 닫아 둔 문을 몇 닢의 동전이 열어 주었다.
매장 전 시신은 지하실 같은 방에 잠시 놓였다. 예르생은 관을 열고 시신 위의 석회를 걷어 낸 뒤 페스트의 특징인 크게 부은 림프절, 즉 가래톳을 찾았다. 조직을 채취해 현미경으로 살피자 똑같이 생긴 짧은 막대 모양 세균이 가득 보였다.
그는 병원 옆 작은 초가지붕 오두막에 연구실을 만들고 그곳에서 살았다. 가져온 기구와 시험관, 세균 배양액, 실험동물 우리가 전부였다. 장비가 너무 빈약해 많은 실험을 할 수 없다고 어머니에게 털어놓았다. 조수도 부족해 거의 모든 일을 혼자 했다.
오두막에는 파리가 들끓었다. 파리가 떼로 죽는 것을 본 예르생은 질병이 어떻게 퍼지는지 알아보기 위해 파리까지 관찰했다. 동시에 세균을 배양하고 동물을 연구했다. 병든 동물에게서 죽은 사람의 조직에서 본 것과 같은 미생물이 발견되었다. 하나씩 쌓인 관찰은 분명한 결론으로 이어졌다. 페스트의 원인이 발견된 것이다.
그는 어머니에게 자신은 건강하고 조금 피곤할 뿐이라며 거의 태연하게 연구 소식을 전했다. 한 편지 끝에는 곧 묘지로 옮겨질 시신 두 구가 기다리고 있다고 쓴 뒤 이렇게 덧붙였다. “편지를 읽고 나면 페스트에 걸리지 않도록 손을 씻으세요!”
예르생과 기타사토, 동시에 이루어진 발견
기타사토도 거의 동시에 페스트 병원체 발견을 발표했다. 같은 도시에서 같은 병을 연구했지만 두 사람이 묘사한 미생물은 일치하지 않았다. 일본 조사단의 결과에는 모순이 있었고 표본에 다른 세균이 섞였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예르생의 설명은 더 명확하고 일관되었다. 다만 의학사가들은 지금도 기타사토의 공헌을 논의하며, 한 사람은 옳고 다른 사람은 단순히 틀렸다고 정리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더 놀라운 점은 처음에 약점처럼 보인 환경이 예르생에게 도움이 되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기타사토에게는 제대로 된 연구실이 있었지만 예르생에게는 오두막과 몇 가지 기구뿐이었다. 그런데 그 임시 연구실의 조건이 해당 미생물에는 더 알맞았다. 장비 부족이 오히려 상대 연구에서 구분하기 어려웠던 특징을 보고 기록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 이는 그의 성공을 설명하는 한 가지 가능성이지, 불결함과 불편함 자체가 과학을 돕는다는 뜻은 아니다.
페스트균은 훗날 그를 기려 Yersinia pestis라는 이름을 얻었다. 예르생의 이름은 냐짱의 거리뿐 아니라 전 세계 의학 교과서에도 남았다.
냐짱으로 돌아오다
발견 뒤 예르생은 프랑스로 돌아갔다. 파리에서는 불과 몇 주 만에 세계적으로 알려진 과학자로 환영받았다. 연구 공로로 프랑스 최고 훈장 가운데 하나인 레지옹 도뇌르를 받았다. 파스퇴르와 동료들은 젊은 연구자의 귀환을 반겼고 파리에서 눈부신 경력이 기다리는 듯했다.
그러나 명성은 예르생의 최종 목표가 아니었다. 자신이 찾은 세균은 여전히 사람을 죽이고 있었으므로 일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에밀 루, 알베르 칼메트와 함께 환자 치료에 사용할 항페스트 혈청을 개발하기로 했다.
그에게는 독자적인 연구실과 계속 일할 장소가 필요했다. 이미 집처럼 느껴지던 냐짱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곳에서 시작한 일은 곧 도시와 파스퇴르 학파의 범위를 넘어섰다. 냐짱은 단순한 여행의 출발지가 아니라 아시아 곳곳의 페스트 환자를 돕기 위한 거점이 되었다.
이때부터 예르생은 잠시 베트남에 온 과학자와 점점 달라졌다. 사람을 치료하고 동물 질병을 연구하며 넓은 지역을 보호할 방법을 찾으면서 오래 머물 삶을 꾸렸다. 동료들이 파리로 돌아오라고 권하자 그는 말했다. “당신이 냐짱을 한 번이라도 보았다면 나에게 파리에 남으라고 권하지 않았을 겁니다.”
사람과 동물을 위한 의사
19세기 말 베트남에서는 질병이 사람뿐 아니라 가축도 위협했다. 가축 전염병은 몇 주 만에 농가를 무너뜨리고 가족에게서 식량과 운송수단, 수입을 빼앗을 수 있었다. 그래서 예르생은 수의학에도 뛰어들었다. 현지 주민에게 이는 추상적인 학문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연구실에는 말과 소, 물소가 들어왔다. 관찰뿐 아니라 치료용 혈청 생산에도 필요했다. 작은 연구소 주위에는 마구간과 목초지, 사료밭, 동물을 돌볼 사람이 필요한 농장이 차츰 생겨났다.
예르생은 거의 모든 것을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 현미경과 파리 강의실에 익숙했던 의사가 이제 가축 품종과 수확을 살피고 불안정한 공급에 의존하지 않는 농장을 고민했다. 여러 작물을 시험하고 동물이 건강하게 지낼 장소를 찾았다.
연구소는 점차 하나의 체계가 되었다. 냐짱에서 질병을 연구하고 혈청을 만들며 농가를 전염병에서 지켰다. 도시 밖 수오이저우에는 연구실과 연결된 대규모 축산농장이 들어섰다. 예르생은 과학을 주변의 삶과 분리하지 않았다. 질병이 가축 떼를 파괴한다면 사무실뿐 아니라 사람이 살고 동물이 풀을 뜯는 현장에서 맞서야 했다.
냐짱 파스퇴르 연구소
1895년 예르생은 냐짱에 연구실을 세웠고, 이는 훗날 파스퇴르 연구소 체계에 편입되었다. 사람과 동물의 질병을 연구하고 혈청을 생산했으며 농장과 직원, 새로운 부서가 차츰 늘었다. 예르생은 장소 선정부터 업무 조직, 축산 연구소 개발, 인도차이나 의료기관과의 연계까지 사실상 맨바닥에서 모든 것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행정부 소속이었으나 1904년 파리 파스퇴르 연구소의 과학적 지도 아래 들어가 냐짱 파스퇴르 연구소라는 이름을 얻었다.
혼바산과 말라리아 치료제
예르생의 일은 해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열대에서 페스트만 위험한 것이 아니었다. 말라리아는 주민과 노동자, 여행자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믿을 만한 약은 기나나무 껍질에서 얻는 퀴닌뿐이었는데 멀리서 수입해야 해 공급이 불안정하고 값도 비쌌다.
예르생은 인도차이나에서 기나나무를 재배하기로 했다. 냐짱에서 약 50킬로미터 떨어진 혼바산은 해안보다 서늘하고 습해 나무의 원산지와 조건이 비슷했다. 정상까지 가는 길은 험했고 숲을 뚫어 길을 내고 연구소 직원들의 숙소도 지어야 했다.
1910년대 중반 혼바산에 작은 연구소가 들어섰다. 예르생은 그곳에서 식물을 관찰하고 현지 기후에 적응하는지 확인했다. 도시 생활은 없었고 산림과 안개, 비, 냐짱까지 이어지는 긴 길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거의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새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이런 장소에 늘 끌렸다.
기나나무는 천천히 자라 빠른 성과를 기대할 수 없었다. 예르생은 인도차이나가 말라리아 약을 스스로 생산할 미래를 위해 일했다. 이후 재배는 지역의 퀴닌 생산 기반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냐짱이 자기 사람으로 받아들인 이
예르생이 1943년 3월 1일 세상을 떠났을 때(파스퇴르 연구소 기록은 2월 27일), 동료와 관리들만 작별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관 뒤에는 냐짱 주민과 쏨꼰 어부, 그가 무료로 치료했던 사람들이 따랐다. 장례 행렬은 3킬로미터 넘게 이어졌다. 도시는 외국에서 온 프랑스 의사가 아니라 이미 자기 사람으로 받아들인 이를 떠나보냈다.
예르생은 유해를 유럽으로 옮기지 말고 수오이저우에 묻어 달라고 남겼다. 탐험했던 땅과 도왔던 사람들 곁에 머물고 싶었다. 무덤은 소박하고 녹음 속에 거의 숨어 있다. 곁의 작은 사당에는 오늘도 꽃이 놓이고 향이 피어난다.
냐짱의 파스퇴르 연구소에서는 예르생 박물관도 방문할 수 있다. 그가 살고 일했던 집에 개인 물품과 책, 편지, 사진, 과학기구가 남아 있다. 작은 전시는 유명한 연구자뿐 아니라 이 물건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살며 냐짱을 집으로 여긴 한 인간을 보여 준다.
베트남에서 그의 이름은 오래전 의학사의 경계를 넘어섰다. 냐짱 사람에게 그는 교과서 속 이름이 아니라 이 해안을 선택해 도시의 기억에 남은 사람이다. 병원과 교육기관이 그의 이름을 사용한다. 스위스에서 태어나 프랑스를 위해 일했고 베트남 국적을 가진 적 없는 사람에게 베트남은 사후 명예시민이라는 드문 영예를 주었다.
하지만 공식 칭호만으로 사람들이 그를 다정하게 기억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지역 이야기 속 예르생은 죽은 뒤에도 치유하고 지키며 선을 베푸는 거의 전설적인 존재가 되었다. 어떤 이들은 그를 의술의 신이 현신한 인물이라 부른다. 그 믿음에는 환자를 찾아가고 아이들에게 영화를 보여 주며 자신이 만든 모든 것을 냐짱 사람들에게 남긴 소박한 의사에 대한 감사와 존경, 기억이 함께 섞여 있다.
그는 배를 타고 현미경 하나와 거의 빈 주머니를 지닌 채 파리에서 잠시 머물 생각으로 이곳에 왔다. 그러나 평생 남았다. 그래서 베트남의 그의 무덤에서 사람들은 페스트균을 발견한 과학자만 기억하지 않는다. 냐짱을 선택했고 영원히 도시의 일부가 된 한 사람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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