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오다이교: 빅토르 위고는 어떻게 성인으로 모셔졌을까

까오다이교: 빅토르 위고는 어떻게 성인으로 모셔졌을까

베트남 남부, 호찌민시에서 북서쪽으로 약 1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떠이닌 성당이 있다. 기둥에는 용이 휘감겨 있고, 입구 위로는 유럽 대성당의 종탑을 닮은 두 개의 탑이 솟아 있다. 이곳에는 1926년 베트남에서 탄생한 종교인 까오다이교의 신자들이 모인다. 이들은 유일한 신을 믿으며, 여러 종교의 스승들이 그 신의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전했다고 여긴다.

떠이닌의 까오다이교 중심 성당. 중앙 입구 위에 신의 눈이 그려져 있다. 사진: Nguyễn Thanh Quang, 2006,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떠이닌의 까오다이교 중심 성당. 중앙 입구 위에 신의 눈이 그려져 있다. 사진: Nguyễn Thanh Quang, 2006, Wikimedia Commons, CC BY-SA 3.0.

입구 근처에는 세 사람이 그려진 벽화가 있다. 그중 한 사람은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다. 《레 미제라블》과 《노트르담 드 파리》를 쓴 바로 그 작가다. 그 옆에는 중국의 혁명가와 베트남의 시인이 서 있다. 까오다이교 신자들은 세 사람 모두를 성인으로 공경한다. 프랑스 작가는 어떻게 이들과 나란히 서게 되었을까?

베트남에서 까오다이교가 탄생한 과정

Cao Đài라는 이름은 두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cao는 ‘높은’, đài는 ‘탑’이라는 뜻이다. 합치면 ‘높은 탑’이 된다. 신자들에게 이 말은 하늘에 있는 신의 궁전을 떠올리게 한다. 이들은 신 자체도 이 이름으로 부르며, 종교의 이름 역시 여기에서 나왔다.

20세기 초 베트남은 프랑스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교육받은 베트남인 가운데에는 프랑스어를 배우고 유럽의 책을 읽으며 프랑스 행정기관에서 일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불교와 도교, 유교가 오랫동안 공존해 온 자국의 신앙에 대한 관심을 간직했다. 한 가정 안에서 조상 숭배와 불교 기도, 공자의 도덕적 가르침이 함께 이어지기도 했다.

훗날 까오다이교 신자가 된 사람 가운데 공무원 응오반찌에우가 있었다. 종교 전승에 따르면, 그는 1921년 푸꾸옥섬에서 근무하던 중 하늘에 떠 있는 눈을 보고 이를 신의 존재를 알리는 징표로 받아들였다. 이후 하나의 눈을 그린 이미지가 새로운 종교의 중심 상징이 되었다. 이를 ‘신의 눈’이라고 부른다. 신자들에게는 신이 사람의 행동을 보고 생각까지 안다는 뜻이다.

당시 사이공, 지금의 호찌민시에서도 영혼과 교신하려는 사람들이 모이고 있었다. 그중에는 세관 직원 팜꽁딱이 있었다.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질문을 하고, 다른 세계에서 온 메시지라고 여긴 답변을 기록했다. 이들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런 메시지를 받아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그런 사람을 영매라고 한다.

이런 모임에서 차츰 새로운 가르침이 생겨났다. 받아 적은 메시지에는 기도하는 방법, 제단을 꾸미는 방식, 살아가는 법이 담겨 있었다. 1926년 신자들은 프랑스 당국에 종교의 설립을 알렸고, 그해 가을 떠이닌 근처 고껜 사원에서 큰 의식을 열었다.

저지섬의 위고와 말하는 탁자

1853년 9월, 저지섬에 있는 빅토르 위고의 집에 한 손님이 찾아와 색다른 제안을 했다. 작가 델핀 드 지라르댕은 죽은 사람과 대화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려면 탁자 하나가 필요했다.

저지섬은 프랑스 해안에서 가까운 영국해협에 있다. 위고는 가족과 함께 그곳에서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다.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쿠데타에 반대했다가 프랑스를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델핀이 찾아오기 10년 전, 가족은 큰 슬픔을 겪었다. 위고의 큰딸 레오폴딘은 1843년 2월 샤를 바크리와 결혼했지만, 그해 9월 부부가 함께 센강에서 익사했다. 레오폴딘은 열아홉 살이었다. 가족은 딸의 결혼식 물건들을 간직했고, 아버지는 딸에게 시를 바쳤다.

저지섬에 온 델핀은 이미 ‘말하는 탁자’를 굳게 믿고 있었다. 당시 유럽의 사교 모임에서는 이런 실험이 관심을 끌었다. 참석자들은 탁자에 둘러앉아 그 위에 손을 올리고 보이지 않는 상대가 신호를 보내기를 기다렸다. 탁자가 들리거나 다리로 바닥을 두드리면 영혼이 보내는 답이라고 받아들였다.

위고의 집에서 한 첫 시도들은 실패했다. 델핀은 탁자가 네모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장난감 가게에서 다른 탁자를 사 왔다. 작고 둥글며 다리가 세 개 달린 탁자였다. 하지만 새 탁자도 처음에는 움직이지 않았다.

답변은 미리 정한 규칙에 따라 해독해야 했다. 한 번 두드리면 ‘예’, 두 번이면 ‘아니요’였다. 긴 메시지는 알파벳 순서에 따라 글자를 세었다. 한 번 두드리면 첫 번째 글자, 두 번이면 두 번째 글자가 되는 식이었다. 짧은 문장도 조금씩 글자를 모아 완성해야 했다.

9월 11일 저녁, 친척과 친구들이 다시 탁자에 둘러앉았다. 그중에는 레오폴딘의 죽은 남편의 형제인 오귀스트 바크리도 있었다. 그는 나중에 회고록에서 이 교령회를 자세히 묘사했다. 바크리는 처음에는 일어나는 일을 믿지 않았다. 탁자가 처음 움직였을 때도 지친 손이 무심코 누른 탓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대화가 이어지자 참석자들은 레오폴딘이 자신들에게 말하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위고는 딸에게 행복하냐고 물었고 그렇다는 답을 받았다.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에 탁자는 두드리는 소리로 ‘빛’이라는 단어를 전했다. 그러자 작가는 딸에게 가려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답은 한 단어였다. ‘사랑하다’.

바크리의 회고에 따르면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울었다. 레오폴딘이 곁에 있으며 자신들에게 답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대화는 계속되었다. 위고는 딸이 가족들의 고통을 보고 있는지, 그들 곁에 머무는지, 다시 올 것인지 물었다.

그날 저녁 이후 교령회는 가족의 일상이 되었다. 작가의 아들 샤를 위고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사람들이 주된 영매로 여긴 이가 바로 그였다. 빅토르도 대화에 참여하고 메시지를 기록했지만 모든 모임에 참석한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참석자들은 다른 인물들에게도 말을 걸기 시작했다. 단테, 셰익스피어, 플라톤, 예수가 답한다고 믿었다. 세상을 떠난 가족에게 묻는 질문 옆에는 신과 불멸, 문학에 관한 대화도 기록되기 시작했다.

교령회는 1855년 가을까지 이어졌고, 질문과 답변, 참석자 이름을 담은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위고는 1885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1923년에는 이 자료의 일부가 출판되었다. 4년 뒤 프놈펜에서는 그의 이름으로 된 메시지를 받기 시작했다.

위고가 까오다이교의 영적 스승이 된 과정

프놈펜은 베트남의 이웃 나라 캄보디아의 수도다. 1927년 캄보디아에는 왕정이 유지되고 있었지만 국정 운영에는 프랑스가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캄보디아는 오늘날의 베트남과 라오스 지역과 함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속했다. 따라서 프랑스 행정당국은 직원을 사이공에서 프놈펜으로 전근시킬 수 있었다. 까오다이교 설립에 참여한 세관 직원 팜꽁딱도 그런 전근 명령을 받았다.

당국은 그를 성장하는 종교 운동에서 떼어 놓으려 했다. 그러나 딱은 캄보디아에서도 신자들을 만나고 교령회를 열었다. 신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1927년부터 빅토르 위고의 영혼이 이들과 대화하기 시작했다.

메시지는 프랑스어와 베트남어로 전해졌다. 참석자들은 위고의 작품을 알고 있었으며, 죽은 사람과 교신하려 했던 작가 자신의 경험은 이들이 하는 일과 맞닿아 있었다.

까오다이교 신자들은 위고를 베트남 밖으로 종교를 전하는 이들의 영적 스승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의 메시지는 그 일을 돕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들의 신앙 안에서 작가에게는 Nguyệt Tâm Chơn Nhơn이라는 또 다른 이름이 생겼다. 대략 ‘달의 마음을 지닌 영적 스승’이라는 뜻으로 옮길 수 있다.

까오다이교 신자들은 유일한 신과 사람을 돕는 영혼들을 구별한다. 위고는 그런 스승들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했다. 또한 그는 베트남의 유명한 서사시 《끼에우전》을 쓴 응우옌주와도 연결되었다. 한 종교적 설명에 따르면 하나의 영혼에서 나뉜 부분들이 서로 다른 사람에게 깃들 수 있다. 두 시인의 관계도 그렇게 설명되었다.

까오다이교 신자들은 위고의 이름을 기도문과도 연결한다. 결혼식의 글, 임종을 앞둔 사람과 죽은 이를 위한 기도문, 장례 의식에 쓰는 말이 그에게서 나왔다고 여긴다. 신자들은 교령회에서 위고로부터 이 글들을 받았다고 믿는다.

세 성인과 신과의 약속

이제 떠이닌 성당 입구의 벽화로 돌아가 보자. 왼쪽에는 황제 지배에 맞서 싸운 중국 정치가 쑨원이 있다. 가운데에는 위고가, 오른쪽에는 16세기 베트남의 학자이자 시인 응우옌빈키엠이 서 있다. 응우옌빈키엠은 미래를 예언하는 능력도 지녔다고 전해진다.

떠이닌 성당의 세 성인. 왼쪽부터 쑨원, 빅토르 위고, 베트남 시인 응우옌빈키엠. 사진: Anthony Leekien, 2014,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떠이닌 성당의 세 성인. 왼쪽부터 쑨원, 빅토르 위고, 베트남 시인 응우옌빈키엠. 사진: Anthony Leekien, 2014,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쑨원이 먹그릇을 들고 있는 동안 양옆의 두 사람은 글을 쓴다. 위고는 깃펜으로 프랑스어를 쓰고, 응우옌빈키엠은 붓으로 한자를 쓴다. 이 벽화의 이름은 ‘세 성인’이다. 까오다이교 신자들은 이를 신과 인류가 약속을 맺는 장면으로 이해하며, 세 인물이 인류를 대표한다고 여긴다.

프랑스어 문구는 ‘신과 인류. 사랑과 정의’라는 뜻이다. 프랑스인, 중국인, 베트남인이 함께 하나의 일을 하고 있다. 신자들에게 이는 서로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 적대감을 넘어설 수 있다는 징표다.

이 벽화는 까오다이교의 여러 분파 가운데 하나인 떠이닌 계통에서 특히 중요하다.

까오다이교 신자들이 위고를 사랑하게 된 데에는 이해할 만한 현실의 역사도 있었다. 훗날 신자가 된 사람들은 학교에서 그의 책을 접했고 연민과 불의, 인간의 존엄성에 관해 읽었다. 1937년 프놈펜 성당 개관식에서는 학창 시절부터 친숙했던 작가에 대한 사랑이 언급되었다.

베트남에서는 위고의 작품을 번역하고 각색했다. 《레 미제라블》을 현지에서 각색한 작품 가운데 하나는 배경을 베트남으로 옮겼고, 주인공을 돕는 신부를 불교 승려로 바꾸었다.

신의 눈과 떠이닌 성당의 색

입구에 위고의 모습이 그려진 이 성당은 까오다이교가 생겨난 지 불과 몇 년 뒤인 1933년에 짓기 시작했다. 성대한 개관식은 1955년에 열렸다. 건물에는 유럽의 종탑을 닮은 탑과 동양의 용, 베트남에서 탄생한 새로운 신앙의 상징이 함께 담겼다.

세 성인의 벽화 뒤로 본당이 펼쳐진다. 안쪽 깊숙한 곳에는 별들과 하나의 눈이 그려진 커다란 구가 있다. 구는 우주를 뜻하고, 눈은 응오반찌에우가 새로운 가르침을 처음 접했던 전승을 떠올리게 한다. 이 상징은 건물 정면에서 사람을 맞이하고, 제단 앞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까오다이교에서는 특별히 신의 왼쪽 눈을 그리며, 이를 동쪽과 떠오르는 태양에 연결한다.

떠이닌 성당에서 별이 그려진 구 위의 신의 눈. 주변에는 용이 휘감긴 기둥들이 있다. 사진: David Williams, 2008, Wikimedia Commons, CC BY 2.0.
떠이닌 성당에서 별이 그려진 구 위의 신의 눈. 주변에는 용이 휘감긴 기둥들이 있다. 사진: David Williams, 2008, Wikimedia Commons, CC BY 2.0.

성직자들이 기도하러 모이면 각자 정해진 자리에 선다. 본당 바닥은 점차 높아지며 아홉 단을 이룬다. 이는 종교 공동체의 아홉 품계에 해당하므로, 예배 중 사람들의 자리는 공동체 안에서의 지위에 따라 달라진다.

같은 질서는 옷에서도 드러난다. 흰옷 사이로 노란색, 파란색, 빨간색 옷이 눈에 띈다. 이 세 가지 색은 남성 성직자들이 입는다. 노란색은 불교, 파란색은 도교, 빨간색은 유교를 뜻한다. 이처럼 서로 다른 가르침을 하나로 모으려 했던 까오다이교의 출발점이 함께 기도하는 자리에서 눈에 보이는 모습이 된다.

많은 신자와 여성 성직자는 흰옷을 입는다. 까오다이교 신자들은 흰색을 순수함과 연결하고, 다른 모든 색을 하나로 아우르는 색이라고 여긴다. 그들에게 이는 하나의 신에게 기도하러 온 사람들의 일치를 표현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기도와 채식, 일상의 규칙

까오다이교 신자는 가족과 함께 살고 일하면서 일상에서 종교의 규칙을 지킬 수 있다. 일부 규칙은 먹는 것과 관련된다. 신자들은 매달 정해진 날에 고기를 먹지 않으며, 더 엄격한 의무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늘 채식을 한다. 따라서 같은 종교 안에서도 습관과 생활방식의 엄격함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다른 요구사항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중요하다. 이는 까오다이교의 규율인 Tân Luật에 적혀 있다. 여기에는 살생, 도둑질, 거짓말, 술 취함을 금하는 조항이 있다. 특히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중요하게 여긴다. 비방과 다툼을 부추기는 일, 약속을 어기는 일도 잘못으로 여긴다. 누군가에게 한 약속조차 종교적 책임의 일부가 된다.

함께 기도하는 시간에는 이런 일상의 관심사가 신과 인간에 대한 믿음과 이어진다. 제단에는 꽃과 술, 차를 바친다. 신자에게는 각각의 제물이 자신의 삶의 한 부분을 뜻한다.

떠이닌 성당의 공동 기도. 흰옷 사이로 성직자의 빨강, 파랑, 노랑 의복이 눈에 띈다. 사진: Jonathan Lewis, 2005, Wikimedia Commons, CC BY-SA 2.0.
떠이닌 성당의 공동 기도. 흰옷 사이로 성직자의 빨강, 파랑, 노랑 의복이 눈에 띈다. 사진: Jonathan Lewis, 2005, Wikimedia Commons, CC BY-SA 2.0.

꽃은 몸, 곧 인간 안에서 물질세계에 속하는 모든 것을 나타낸다. 술은 생명력, 차는 영혼과 연결된다. 따라서 까오다이교 신자는 이를 바치며 자기 자신을 신에게 봉헌한다. 자신의 몸과 힘, 영적 삶을 함께 바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