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리프트 작전: 고향을 떠나야 했던 베트남 아이들의 삶
1975년 봄, 베트남 전쟁은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북베트남군이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도시를 떠나려 했고, 보육원과 자선단체 직원들은 아이들을 대피시킬 방법을 찾았다. 4월 3일,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이 아이들의 대피를 발표했다. 이 작전은 베이비리프트(Babylift)라는 이름을 얻었다.
목표는 아이들을 전쟁으로부터 보호하고 해외의 입양 가정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군용기와 민간 항공기가 갓난아기부터 좀 더 큰 아이들까지 수천 명의 어린 승객을 베트남 밖으로 실어 날랐다. 미국과 호주 등 여러 나라에서 가족들이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작전을 다룬 보도에서는 아이들을 고아라고 불렀다. 하지만 일부 아이들의 부모는 베트남에 살아 있었다. 가족들은 더 이상 먹을 것과 돌봄, 안전을 제공할 수 없게 되자 아이들을 보육원에 맡겼다. 부모들에게는 힘든 시기를 넘긴 뒤 아들이나 딸을 다시 집으로 데려오기 위한 임시방편일 수 있었다. 일부는 나중에 바다 건너에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아이의 출국에 동의했다. 그 앞에 입양이, 어쩌면 평생의 이별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사이공을 떠난 비행기
1975년 4월 4일, 사이공의 떤선녓 비행장에서 베이비리프트 작전의 첫 군용기 출발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필리핀의 미국 클라크 공군기지로 이동한 뒤 다시 미국으로 갈 예정이었다. 승객 가운데는 품에 안겨 옮겨지는 갓난아기도 있었고, 스스로 비행기에 오를 수 있는 큰 아이들도 있었다. 의료진과 자원봉사자들이 동행했으며, 미국 기관 직원들도 함께 베트남을 떠났다.
이 비행에는 C-5A 갤럭시가 배정되었다. 평소 군사 장비를 운반하던 거대한 군용 수송기였다. 의료 후송 장비가 갖춰져 있지 않았기에 승무원과 의료진은 아이들과 동행하는 어른들을 어디에 어떻게 앉힐지 궁리해야 했다. 위층에는 좌석이 있었지만 모든 승객을 수용할 수 없었다. 일부 아이들은 화물칸 바닥에 눕혀야 했다.
기장은 얼마 전 둘째 아이가 태어난 데니스 트레이너 대위였다. 출발 전 아이들을 운송하는 데 무엇이 필요하냐는 질문에 그는 부모라면 누구나 아는 물건들을 꼽았다. 우유, 주스, 담요, 기저귀였다. 군 간호사 레지나 온이 의료팀을 이끌었다.
갓난아기들은 사람들의 손에서 손으로 건네져 비행기에 올랐고, 한 좌석에 두 명씩 눕혀 안전띠로 고정했다. 아래층에서는 아이들을 동행한 여성들이 담요와 베개, 화물 고정끈을 이용해 아이들 곁에 자리를 잡았다. 비행기가 사이공을 떠나 필리핀으로 향할 때 탑승자는 삼백 명이 넘었다.
동행한 여성 한 명이 몸이 좋지 않아 레지나가 약을 가지러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갑자기 커다란 폭음이 들렸다. 주위가 안개와 먼지로 뒤덮이고 물건들이 객실을 날아다녔으며, 찬 공기가 비행기 안으로 밀려들었다. 안개가 걷히자 방금 올라왔던 계단이 사라진 것이 보였다. 동체가 찢어진 틈으로 저 아래 바다가 보였고, 아래층에는 더 이상 내려가 도울 수 없는 아이들이 남아 있었다. 비행기는 급격히 고도를 잃고 있었다.
트레이너 대위는 비행장을 향해 돌아가려 사이공 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하지만 뜯겨 나간 화물칸 문이 조종 계통을 손상시켰고, 비행기는 조종사의 조작에 거의 반응하지 않았다. 조종사들은 엔진 추력을 바꾸며 비행기를 공중에 붙들어 두려 했고, 의료진과 동행인들은 아이들을 고정하고 비상착륙에 대비했다. 아래층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그곳에 남은 모든 사람을 돕는 일은 이미 불가능했다.
비행기는 활주로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논 한가운데 땅에 부딪힌 뒤 다시 튀어 올랐고, 두 번째 충격 후 여러 조각으로 부서졌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있던 아래 화물칸은 짓눌렸다. 위층은 훨씬 온전하게 남았으며, 그곳에 누워 있던 많은 갓난아기들이 살아남았다.
충격으로 레지나는 통로를 따라 내던져졌다. 발과 척추뼈 하나가 골절되었지만 다른 생존자들과 함께 잔해 속 아이들을 밖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밖에서는 사람들이 논의 진흙에 무릎까지 빠졌다. 추락 현장에 헬리콥터들이 도착했고, 아기들은 사이공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품에 안겨 헬리콥터로 옮겨졌다. 레지나는 의식을 잃을 때까지 도왔다. 깨어났을 때는 헬리콥터 바닥에 누워 있었다.
이 사고로 138명이 숨졌고 176명이 살아남았다.
다른 비행기들로 대피가 계속되었고, 구조된 아이들은 치료를 받으며 다음 여정을 준비했다.
에린 록하트
어린 에린 록하트도 이 비행기에 타고 있었다. 구조된 뒤 미국으로 보내져 록하트 가족에게 입양되었다.
에린은 북부 버지니아와 캘리포니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양부모는 어릴 때부터 베트남과 입양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으며, 에린이 온 과정과 관련된 편지, 사진, 신문 스크랩을 보관했다.
사진 중에는 베트남 보육원에서 찍은 흑백사진 두 장이 있었다. 한 장에서는 에린의 입양 가정을 찾는 데 도움을 준 수녀가 에린을 안고 있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에린은 학교 글쓰기 대회에 자신의 과거에 관한 글을 내어 1등을 했다.
고등학교를 마친 뒤 에린은 버지니아 공대에서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했고, 나중에는 웹스터 대학교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결혼하고 미국 국방부 관련 업무를 했으며, 사진 촬영과 정보 자료 제작에 종사했다. 베트남전 참전 군인들에게 보내는 공개편지에서 에린은 미국에서의 삶이 가져다준 기회에 대해 이야기했다. 교육과 일, 그리고 인연을 맺게 된 사람들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에린은 추락한 비행기에서 아이들을 옮겨 낸 간호사 레지나 온에 관한 기사를 인터넷에서 발견했다. 1997년에는 레지나를 찾아내 전화를 걸어 자신을 구해 준 데 감사할 수 있었다.
레지나는 나중에 그 통화에서 말을 찾을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탑승 때 갓난아기들이 손에서 손으로 자신의 품에 건네졌고, 사고 후에는 다시 다른 곳으로 보내졌다. 수년 동안 레지나는 그 아이들이 어디에서 자라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알지 못했다.
두 여성은 연락을 이어갔다. 2000년대 초에는 레지나가 복무하고 에린이 일하던 뉴멕시코에 둘 다 있게 되었다. 더 자주 만나며 가까워졌다. 레지나의 자녀들은 에린을 가족으로 받아들였고, 에린은 점차 이 간호사를 자신의 두 번째 엄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데바키 머치
2015년 에린과 레지나는 베이비리프트 작전에 관한 책을 함께 출간했다. 독자 중에는 추락 사고에서 살아남은 또 다른 소녀, 데바키 머치가 있었다. 사랑이 넘치는 입양 가정에서 자란 데바키는 에린의 이야기에서 자신의 감정을 발견했다. 인터넷으로 저자를 찾았고, 나중에 두 여성은 만났다.
베트남을 떠날 때 데바키는 생후 아홉 달이었다. 입양 가정은 이미 1975년 1월에 정해졌고, 하와이에서 몇 달 동안 데바키의 도착을 기다렸다. 어른이 되어서야 데바키는 미래의 어머니가 무엇을 겪었을지 생각했다. 아이가 비행기에 올랐다는 소식을 기다리고, 추락 사실을 알게 되고, 다시 기다려야 했다. 이번에는 아이가 살아 있는지에 대한 답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데바키의 가족은 출신을 숨기지 않았고, 데바키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신의 생존을 도왔는지 알며 자랐다. 나중에 다른 입양인들, 그리고 한때 이들의 출국을 도왔던 여성들과 함께 베트남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전쟁 중 돌보던 아기들을 아직 기억하는 보육 담당자들을 만났다. 데바키는 처음으로 자신과 닮은 사람들 사이에 있었다. 함께 찍은 사진들을 놀라워하며 바라보았다. 이전에는 그런 닮은 모습을 거의 어디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다.
2024년 봄, 데바키는 베트남 아이들과 일했던 수녀를 만나러 콜로라도로 갔다. 수녀의 기억을 어떻게 보존할지 이야기하다가 집 지하실에 문서 상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편지와 사진, 개인 기록 사이에 첫 베이비리프트 비행기의 승객 명단이 남아 있었다. 생존자 명단에서 데바키는 보육원에서 불리던 이름인 미모사로 자신을 찾았다.
발견된 명단에는 에린의 이름이 없었다. 데바키에게 그 사실을 들은 에린은 양어머니에게 부모가 자신이 추락 사고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물었다. 어머니는 입양 당시 아이가 추락한 비행기에 타고 있었고 살아남았다는 설명을 들었다고 답했다. 에린은 그 이야기와 함께 자랐지만, 발견된 문서로는 확인할 수 없었다. 명단 작성 때 이름이 빠졌을 수도 있고, 다른 비행기로 베트남을 떠났을 수도 있었다. 에린은 더 이상의 증거를 찾지 않기로 했다.
데바키는 기록 보관 작업을 계속하며 다른 입양인들이 자신에 관한 정보를 얻도록 도왔다. 수십 년 동안 편지와 사진, 기록은 상자에 남아 있었다. 이제 그 페이지에서 삶이 시작된 사람들이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볼더의 전시
2026년 봄, 데바키는 자신이 수집한 문서들을 볼더에서 전시했다. 벽에는 베트남과 대피한 아이들이 자란 나라들을 실로 연결한 지도가 걸렸고, 탁자에는 개인 기록을 담은 파일들이 놓였다. 방문객 중에는 아버지가 아홉 살에 베이비리프트 비행기 한 편으로 베트남을 떠났고, 반세기가 지난 뒤 라스베이거스에 살고 있는 한 젊은이가 있었다.
파일들 곁에 선 젊은이를 본 데바키는 다가가 많은 입양인들이 이전에는 접근할 수 없었던 문서들에 관해 설명했다. 이야기하던 중 파일 하나를 열었다가 뜻밖에 그의 아버지 기록을 발견했다. 젊은이는 곧바로 아버지에게 전화해 발견한 사실을 알렸다. 바로 다음 주말, 아버지는 라스베이거스에서 볼더로 날아왔다.
그곳에서 데바키의 기록 정리를 돕던 수녀가 방문객에게 개인 파일을 보여 주고 그의 과거에 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서류 가운데에는 그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린 시절 사진이 있었다.
레 미 흐엉
볼더 모임의 프로그램에는 친가족 찾기에 관한 대화도 포함되었다. 전쟁으로 헤어진 아이들과 부모가 서로를 찾도록 돕는 단체 Con Tìm Mẹ의 대표들이 진행을 제안했다. 이 단체를 이끄는 사람은 베이비리프트 당시 호주로 보내진 레 미 흐엉이다.
흐엉은 다섯 살, 남동생은 세 살이었다. 두 아이는 흰 차의 뒷유리창 너머로 엄마라고 부르던 여성이 울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여성은 아이들이 휴가를 떠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 만남은 거의 삼십 년 뒤에야 이루어졌다.
호주에서 남매는 이미 아들 둘이 있는 가정에 입양되었다. 흐엉은 영어를 몰랐고 모든 것이 낯설었다. 무엇보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여덟 살이나 아홉 살이 될 때까지 잠들기 전 울었다. 양부모는 베트남 엄마가 죽었다고 말했다.
열다섯 살에 흐엉은 양어머니를 잃었다. 가족 서류를 정리하다 베트남에서 온 편지와 발신 주소를 발견했다. 그 주소로 편지를 썼고 짧은 팩스 답장을 받았다. 엄마는 살아 있었고 소식을 매우 반가워했다.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지만, 십 대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감정이 너무 버거웠다. 흐엉은 어른이 되어서야 다시 찾기에 나설 수 있었다.
몇 년 동안 잠비아에서 고아들을 도왔고, 호주로 돌아온 뒤에는 알코올과 약물 의존 재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2004년 3월, 흐엉은 어린 시절을 보낸 껀터를 찾아갔다. 아는 사람이 흐엉을 알아보고 출국 전 헤어졌던 여성을 불렀다. 그 여성은 십 분 뒤에 왔다.
흐엉은 친척들의 얼굴과 옛집 근처 골목을 알아보며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베트남에 남아 집을 사고 가족을 도왔다. 영어를 가르치고 아이들과 일했으며, 나중에는 두 남자아이를 입양했다.
2018년, 체육관에서 운동하던 흐엉에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오기 시작했다. 이어 문자가 왔다. 흐엉의 어머니는 호 티 잇이라는 내용이었다. 집에서도 전화는 계속되었다. 흐엉은 사촌이라고 생각하던 여성에게 전화기를 건넸다. 상대의 말을 들은 여성은 자신들이 친척이 아니라고 말했다.
호 티 잇은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힘든 출산과 출혈을 겪은 뒤 친구에게 잠시 아기를 돌봐 달라고 부탁했다. 아이가 생후 세 달이 되었을 때 친구는 이사하고 연락을 끊었다. 그 친구가 바로 흐엉이 어릴 때부터 어머니로 여겨 온 여성이었다.
잇의 손녀가 딸을 찾는 데 도움을 주었다. 흐엉의 베트남 귀환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본 것이다. 가족은 전화번호를 알아냈고 DNA 검사로 혈연관계가 확인되었다.
흐엉은 며칠 동안 울었다. 자신의 가족에 대해 잘못 알고 살아온 세월을 깨닫는 것이 특히 아팠다. 잇과 만난 뒤 흐엉은 두 아들과 함께 어머니와 살기 시작했다. 아이들에게도 할머니가 생겼다.
자신의 경험은 Con Tìm Mẹ에서 하는 일에도 영향을 주었다. 흐엉은 다른 이들이 친가족을 찾도록 도우며 DNA로 혈연관계를 확인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익숙한 얼굴과 기억, 심지어 남아 있는 서류도 이야기의 일부만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이디 버브
하이디 버브 역시 친어머니와 만나면 가족을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미국에서 자신을 입양한 여성은 하이디와 관계를 끊었고, 그 상실은 결혼하고 두 딸을 낳은 뒤에도 아픔으로 남았다. 입양 서류에서 베트남에서 온 편지를 발견한 하이디는 친어머니도 자신을 찾으려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태어났을 때 이름은 마이 티 히엡이었다. 베트남인 어머니 마이 티 낌은 미군과의 사이에서 낳은 여섯 살 딸을 걱정했다. 사이공 진격을 앞두고 혼혈 아이들이 살해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1975년 봄, 낌은 아이를 보육원에 맡겼고, 그곳에서 소녀는 베이비리프트 프로그램으로 해외에 보내졌다.
미국에서 히엡은 독신 여성 앤 네빌에게 입양되었다. 하이디라는 이름으로 테네시의 작은 마을에서 자라 교회에 다니고 소프트볼을 했으며 친구들을 집에 불러 함께 밤을 보냈다. 양어머니는 딸이 완전히 미국인이 되어 출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기를 바랐다. 하이디는 베트남어를 몰랐다.
앤과의 관계는 하이디가 대학에 다니던 때 끝났다. 집을 방문했다가 어머니가 정한 시간보다 십 분 늦게 도착한 하이디는 문이 잠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친구 집에서 밤을 보낸 뒤 돌아왔지만 앤은 나가라고 했다. 화해하려는 노력은 아무 결과도 얻지 못했다.
1997년 3월, 하이디는 다낭으로 갔다. 친어머니는 공항에서 딸을 만나 껴안고 울었다. 이십이 년 동안 떨어져 있었던 낌은 언제나 딸 곁에 있고 싶었다. 처음에 하이디는 이런 애정을 기쁘게 받아들였지만, 끊임없는 관심은 곧 부담이 되었다. 미국에 남아 있는 남편과 어린 딸들이 그리웠다.
친척들이 방문에 다른 기대도 걸고 있다는 사실이 점차 드러났다. 자매 중 한 명이 아이들의 교육비를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출국 전 오빠 띤은 어머니 이야기를 꺼냈다. 하이디가 어머니를 미국으로 모셔 가거나 생활비를 보낼 수 있을까?
베트남에서는 전통적으로 나이 든 부모를 돌보는 책임이 성인 자녀에게 있다. 가족이 일상적인 돌봄과 생계비를 함께 제공하는 경우가 많다. 하이디의 형제자매들은 이미 그 책임을 나누고 있었으며 바다 건너 사는 자매의 도움을 기대했다. 하지만 하이디에게 며칠을 함께 보낸 사람들은 이제 막 가까워지고 있는 이들이었다.
대화는 눈물로 끝났다. 하이디는 방을 나갔다. 어머니를 만나러 왔는데, 돈을 부탁하는 말을 가족을 부양하라는 요구로 받아들였다. 띤은 아무도 동생에게 강요하지 않으며 거절할 권리가 있다고 설명했다. 낌 역시 딸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고, 언어와 서로 다른 삶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돌아온 뒤 하이디는 베트남에서 오는 편지를 읽기 힘들었다. 새로 도움을 요청하는 내용은 아픈 대화를 떠올리게 했다. 연락은 뜸해졌다. 그래도 하이디는 만남이 이루어져 기쁘다고 말했다. 친어머니를 보고 자신의 가족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기욤
레 미 흐엉의 단체가 도운 사람들 가운데 프랑스에서 자란 베트남 소년 기욤도 있었다. 그 역시 첫 베이비리프트 비행기의 추락에서 살아남은 뒤 입양 가정으로 갔다. 부모는 어린 아들에게 하늘에서 떨어져 열린 선루프를 통해 곧바로 자신들의 차 안으로 들어왔다고 이야기했다.
그 어린 시절 이야기 뒤에는 기욤이 거의 알지 못하는 과거가 있었다. 학교에서는 “꼬마 중국인”이라고 놀림을 받았고, 오랫동안 주변 사람들처럼 백인이 되고 싶었다. 2001년 딸이 태어나자 자신의 역사 중 베트남에 관한 부분도 딸에게 전해 주고 싶어졌다. 하지만 먼저 자신부터 알아야 했다.
2004년 기욤은 자신이 떠나온 보육원을 찾아가 갓난아기 때 돌봐 준 수녀를 만났다. 수녀는 아이를 기억했지만 친가족 찾기는 권하지 않았다. 수녀의 말로는 찾을 것이 없었다. 기욤은 첫 여행에서 낙담한 채 돌아왔다.
2020년 새로운 가능성이 생겼다. DNA 검사로 베이비리프트 이후 역시 프랑스에 입양된 친척 안카트린을 찾았다. 오 년 뒤 안카트린은 베트남으로 가 가족을 만났다. 레 미 흐엉의 텔레비전 호소가 도움이 되었다. 안카트린의 자매가 응답하고 검사를 받은 것이다.
재회하는 동안 안카트린은 기욤에 관해 이야기했다. 자매가 친척들에게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고, 아침이 되자 기욤의 어머니일 수 있는 여성을 찾았다.
2026년 1월, 기욤은 아내와 함께 만나러 갔다. 도착을 몇 분 앞두고 혈연관계 확인 소식이 왔다. 집에서는 대가족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기욤의 아버지가 아들이 태어나기 전 전쟁에서 죽었다고 말했다. 힘든 출산과 출혈 후 자신도 죽을까 두려워 아기를 속짱의 수녀들에게 데려갔다. 회복한 뒤 아이를 찾으러 돌아왔지만, 아이가 비행기로 해외에 보내졌다는 말을 들었다. 어느 나라인지는 알려 주지 않았다.
기욤은 왜 자신을 두고 갔는지 의문을 품으며 자랐다. 어머니는 아들이 어디로 보내졌는지 모른 채 언젠가 돌아오기를 바라며 살았다. 아기가 비행기 사고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만났을 때에야 알았다. 통역사가 그 이야기를 설명해 주었다.
재회 후 기욤은 친가족과 삼 주를 보냈다. 이후 인터뷰에서 어머니가 하루에 여러 번 자신에게 전화하고 아내에게도 전화한다고 이야기했다. 이들은 계속 서로를 알아가며 이전에는 기회조차 없었던 관계를 만들어 가고 있다.
찾기는 계속된다
2026년에도 데바키 머치는 기록을 정리하고, 이제 어른이 된 베이비리프트 아이들에게 과거에 관한 문서를 돌려주는 일을 계속한다. 레 미 흐엉과 Con Tìm Mẹ는 남아 있는 정보와 DNA 검사 결과를 대조하며 헤어진 가족들이 서로를 찾도록 돕는다.
일부 어머니들은 아직 아이들을 기다린다. 기욤이 어머니와 만난 것은 2026년 1월이었다. 해마다 그런 기회는 줄어들지만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찾기는 계속된다. 형제자매와 조카, 가족의 기억과 사진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평생 자신의 출신을 거의 알지 못했던 사람에게 이들과의 만남은 자기 가족과의 첫 만남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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